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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품위생법’ 개정 끝에 신라면 상표명 획득
1986년. 그러니까 신라면이 세상에 나오기 직전 신춘호 농심 회장은 이렇게 말했다. 경영진은 반대했다. 한자를 상품명으로 쓴 전례도 없었고 당시 브랜드 제품은 대부분 회사명을 중심으로 이뤄졌다. 그러나 발음이 편리하고 ‘매운라면’이라는 제품속성이 분명히 드러난 데다 한자를 사용해 독특한 분위기를 연출할 수 있다. 그래서 탄생한 이름이 ‘辛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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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여곡절이 많았다. 당시 식품위생법상 상품명은 한글로 해야 하고 외국어 병기 땐 한글표시보다 크게 할 수 없었다. ‘辛’이 라면보다 크게 표기되는 신라면은 이 법에 걸렸다. 신 회장은 이해할 수 없었다. 수천 년간 한자문화권인 한국에서 한자를 외국어로 분류하는 것이 타당한지, 즉각적인 의미전달과 이미지 부각이 생명인 상품명에서 한글보다 한자를 크게 쓸 수 없다는 규정이 합리적인지 반론을 제기했다. 불필요한 규제가 식품산업을 저해할 수 있다는 판단에서다. 결국 보건사회부(保健社會部·현 보건복지부)에서 농심의 건의를 받아들여 1988년 10월 법 조항을 개정했다. 이후 신라면은 농심의 단독 상표명으로 등록됐다.
매운 맛의 비밀은 일명 ‘다데기’
신라면은 신 회장의 라면철학을 집대성한 제품으로 꼽힌다. 신라면의 매운 맛의 비밀은 무엇일까. 소고기의 깊은 맛과 고춧가루의 얼큰한 맛이 조화를 이룬 ‘매운 맛’, 이 맛을 찾기 위해 신라면 개발팀은 신 회장의 지시에 따라 전국서 재배되는 모든 품종의 고추를 사들여 실험했다. 위장을 혹사해 가며 하루 20번이 넘게 매운 국물을 마시며 스프 개발에 몰두했지만 번번이 실패. 어느 날 개발팀에서 나온 작은 아이디어가 없었다면 신라면은 세상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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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면이 출시되자마자 매출은 가파른 상승 곡선을 그렸다. 출시 이후 석 달 동안에만 30억원에 육박하는 판매고를 시작으로 이듬해에는 180억원을 웃도는 매출을 올리며 국내 라면시장의 대표 주자로 뛰어 올랐다. 신라면이 인기 반열에 오르자 이름에 얽힌 에피소드도 많다. 한자 ‘辛(매울 신)’ 자를 ‘幸(다닐 행)’자로 혼동해 “행라면 주세요”라고 하거나 한자를 모르는 이들은 ‘푸라면’으로 통했다.
“농심 브랜드 그대로 나가 ‘한국의 맛’을 알려야 한다.” 매운 맛에 익숙하지 않은 미국인에게 신라면을 판다는 것은 큰 모험이었다. 그러나 신 회장의 이른바 ‘매운 맛’에 대한 철학은 해외서도 통했다. 한국 식품 최초로 미국 전역 4692개 월마트(Wal-Mart) 전 점포에 입점되는 진기록을 세웠다. 현재 미 국방부와 국회의사당 등에서 라면류로는 처음이자 유일하게 판매되는 라면 역시 신라면이다.
“국민을 위해 라면을 만들었다”
신라면이 세계인의 입맛을 사로 잡을 수 있었던 이유는 신 회장이 ‘맛있는 라면’에 대한 고집 때문이다. 신 회장의 라면 사랑은 서경배 아모레퍼시픽그룹 회장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서 회장은 자신의 장인인 신 회장에게 농심 창립 50주년 기념식에 맞춰 ‘라면 조각상’을 선물했다. 서 회장이 농심의 성장동력이었던 라면을 조각물로 만들어 장인에게 존경의 뜻을 표시한 것. 서울 대방동 농심 본사에 있는 이 조각상은 김병호 작가의 작품으로 너비 3m, 높이 4m의 라면 모양으로 만들어 졌다.
신라면, 전세계 ‘민간외교관’ 역할 톡톡
신라면은 연간 국내·외에서 약 6000억원치가 팔리며 식품한류 신화를 다시 쓰고 있다. 어느덧 사나이 울리는 라면에서 세계인을 울리는 글로벌 라면으로 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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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 최남단에는 ‘신라면집’이라고 불리는 라면가게도 있다. 남미 칠레 남쪽 끝 마젤란 해협에 있는 인구 12만의 도시 ‘푼타 아레나스(Punta Arenas)’. 아르헨티나의 우슈아이아와 더불어 지구 최남단 도시 타이틀을 달고 다니며 남극으로 가는 관문인 이곳에 한글로 ‘辛라면’ 간판을 단 라면가게 ‘신라면집’이 자리 잡고 있다. 칠레를 여행하는 한국 관광객들이 주로 다녀가면서 자연스레 붙여진 이름이다.
신 회장은 “단순 소박하나 정직하고 인정이 넘치는 마음, 언제까지나 변함없이 농사를 짓는 겸허한 마음으로 기업을 운영하겠다는 생각은 내가 지난 반세기 동안 회사를 이끌어 오면서 지키려고 애쓴 철학이었다”며 “그런 정신이 있었기에 세상이 바뀌어도 끊임 없이 새로운 트렌드를 창조하며 식품문화를 이끌 수 있었다”고 밝혔다.